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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하려는 말은 그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해도 덧글 0 | 조회 84 | 2021-04-09 13:36:23
서동연  
그녀가 하려는 말은 그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해도 또래의 남자아이들에 비하면 훨씬 현실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만약 다른 자리에서 이런 말을 일반론으로 들었다면, 어쩌면 그 의견에 찬동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의 문제였다. 난 납득이 안 가, 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너를 아주 사랑하고 있고, 너랑 하나가 되고 싶어. 이런 나의 바람은 아주 확실한 것이고, 내게는 무척 중요한 일이야. 가령 거기에 현실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해도, 솔직히 그건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나는 그만큼 너를 좋아하고 있어. 사랑하고 있다고. 그녀는 또 고개를 저었다. 정말 어쩔 도리가 없구나, 라고나 말하려는 듯. 그리고는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사랑에 대해 우리가 뭘 알고 있을까, 라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 사랑은 아직 아무런 시련도 당하지 않았어. 우리는 아무런 책임도 지고 있지 않다고. 우린 아직 어린애야. 너나 나나.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서글펐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벽을 쳐부술 수 없는 것이 서글펐다. 방금 전까지, 그 벽은 그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그의 앞 길을 막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꼈다. 나는, 이제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그는 느꼈다. 나는 아마도 이대로, 이 막강한 틀에 갇힌 채, 거기에서 밖으로 나가도 못하고, 허망하게 나이를 먹어가겠지, 하고.결국 두 사람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런 관계를 계속하였다. 도서관에서 만날 약속을 하여, 함께 공부를 하고, 옷을 입은 채 페팅을 하였다. 그녀는 그런 두 사람의 관계의 불완전성이 조금도 거슬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녀는 그런 불완전성을 즐기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였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 두 사람이 아무런 문제없이 청춘을 보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미스터 클린과 미스 클린. 그 혼자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기분을 품고
현실성이란 관점에서 보면, 그게 가장 현실적이겠지가노 크레타가위에 눌렸던 일도, 아침까지 한 잠도 못했다는 것도, 나는 남편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딱히 숨길 마음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말한다고 어떻게 되는 일도 아니고, 게다가 하룻밤쯤 잠을 못 잤다고 해서 별 대수로운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누구한테든 가끔은 그런 일이 있는 것이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남편에게 커피를 끓여 주고, 아이에게는 뜨거운 우유를 주었다. 남편은 토스트를 먹고, 아이는 콘 플레이크를 먹었다. 남편을 신문을 죽 훑어보고, 아이는 새로 배운 노래를 작은 소리로 흥얼거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블루 버드를 타고 나갔다. 여느 때와 아무 다를 것이 없다. 두 사람이 집을 나선 다음, 나는 소파에 앉아,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하고 생각하였다. 할 일이 무엇인가? 반드시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나는 부엌에 가서 냉장고 문을 열고, 안을 점검하였다. 그리고는 오늘 하루쯤 시장을 않아도, 특별히 지장은 없겠다고 확인하였다. 빵도 있다. 우유도 있다. 계란도 있다. 고기 냉동되어 있다. 채소도 있다. 내일 점심때까지는 먹을 거리가 있다. 은행에 갈 일이 있었지만, 반드시 오늘 중에 가야하는 일을 아니었다. 내일로 미뤄도 지장은 없다. 나는 소파에 앉아 안나 카레리나를 읽었다. 다시 읽으며 새삼스레 깨달은 일인데, 나는 안나 카레리나의 내용을 거의라고 해도 좋을 만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등장 인물도, 장면도, 별 기억이 없었다. 전혀 다른 책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신기한 일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읽었을 때는 제법 감동을 했을 텐데, 결국은 아무 것도 머리 속에 남아 있지 않다. 그 당시 느꼈을 감정의 떨림이며 고양된 기분은, 어느 틈엔가 깨끗이 하나도 남김없이 떨어져나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내가 책을 읽느라 소비한 방대한 시간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책을 덮고, 한 참을 그 점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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